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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가득한 책방/에세이

나를 뺀 세상의 전부 _ 김소연 산문집

by 더불어숲 2022. 12. 28.

오롯이 경험을 통해 서술한 생의 단편들은 빨래를 개거나, 수박을 쪼개거나, 아는 길을 산책할 때 솟아난다. 더위에 지친 할머니에게 꿀물을 타주는 것, 버려진 곰인형을 안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손수 주물러 빠는 것, 말이 서툰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 엄마의 노년을 지켜보는 것. 사소한 것 같지만 제법 사소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관계와 일상을 이야기하며 나와 다르지 않은 시인의 세계를, 우리가 소홀했던 삶의 단면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기존의 산문집과 다르게 경험한 것들만 쓰겠다는 다짐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일상을 자세히, 섬세한 시선으로 적어보고자 시작했고 오직 직접 만났거나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옮겨 기록했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오직 경험하고 생각한 것, 직접 만나고, 보고, 겪은 것들을 쓴 ‘몸으로 기록한 책’이다.

 

 

책 속 한 토막

 

‘상관 쓰여요’

동생의 개인전이 시작된 날, 꽃다발을 두 손 모아 들고 찾아온 최연소 손님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미술을 가르칠 때 만났던 다섯 살 아이라 했다. 아이의 엄마는 낯을 가려 엄마 뒤에 숨는 아이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태어나 처음 갤러리 나들이를 하는 거라 했다.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갈 때, 거기까지 와준 그 아이와 그 엄마에게도 동석을 권했다. 아이는 식당 한편에 앉아 숟가락을 손에 꼭 쥔 채로, 입을 반쯤 벌리고 골똘하게 사람들을 구경했다. 귓바퀴를 따라 혹은 콧방울이나 입술에 피어싱을 박아 넣은 사람, 초록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닭 볏처럼 세운 사람, 욕설을 섞으며 대화를 나누다 깔깔 웃는 사람. 아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만화 속 악당을 바라보듯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쓰여 아이 앞에 반찬을 내밀어주었다.

 

“좀 이상해 보여?” 하고 말을 걸어보았다. 아이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어 보였다. 그러곤 대답을 했다. “상관 쓰여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의 말을 곱씹었다. 상관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의젓함과, 실은 신경 쓰인다고 고백하고 싶은 속내가 동시에 표출된 표현이었다. 나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한 채로, 그 아이가 무사히 밥을 다 먹을 수 있게 반찬을 챙겨주었다.

 

갓 자유자재로 말을 구사하기 시작했지만 언어적 관습에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이 다섯 살은, 자신의 야릇한 심정을 대변해줄 표현을 이렇게나 순식간에 발명할 수 있구나 싶어 존경스러웠다.

저자 - 김소연

시인. 수없이 반복해서 지겹기도 했던 일들을 새로운 일들만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숨쉬기. 밥 먹기. 일하기. 또 일하기. 낙담하기. 믿기. 한 번 더 믿기. 울기. 울다가 웃기. 잠들기. 이런 것들을 이제야 사랑하게 되었다. 시가 너무 작아진 것은 아닐까 자주 갸우뚱하며 지냈고, 시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커다래졌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중이다.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와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 『나를 뺀 세상의 전부』,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등을 썼다. 팀 '유후'의 공동 시작(詩作) 공동시집 첫 번째 프로젝트 “같은 제목으로 시 쓰기”로 공동시집을 펴낸 후 두 번째 프로젝트 “빈칸 채워 시 쓰기”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등을 함께 썼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기의 생각과 주장은 배제하고 글쓰기를 했다. 저자는 하릴없이 보낸 하루 속에서, 의미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 매일이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자만의 통찰력이 담긴 관찰력이란 시선으로 번데기에서 비단을 뽑아내듯 사유의 기록들을 담아냈다.

 

하나의 특별하고 독창적인 경험이 아닌 소소하고 작은 별다를게 없는 이런 경험들의 파편들이 모여 또 다른 경험을 만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특별함이 있다. 익숙한 나머지 따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순간들에, 너무 당연해서 가끔 소중함을 잊는 관계들에, 저마다 크고 작은 추억이 깃든 사물들에, 시인이 발견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시인이 직접 겪고 사유하고 기록한 이야기들이 익숙한 것들을 자꾸만 낯설게 만들어 뒤돌아보게 한다. 시인이 만난 모든 접촉면들이 사물과 타인들로부터 촘촘히 스며들었다.

 

경험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가장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방법, 삶을 오해 없이 이해하는 방법이 아닐까. 저자의 하루가 새삼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소하고 소소한 일들 안에서 끊임없이 ‘따뜻한 무언가’를 찾아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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