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속엔 깊은 바닷속에서 숨 참아가며 바다가 허락한 먹을거리 캐올리는 해녀들의 가쁜 숨비소리가 있고, 밤배 타고 나가 어린것들과 아낙을 먹이는 애비라는 이름을 지닌 어부들의 애틋한 사랑이 절절히 녹아 있다. 바다에서 태어났거나 이따금 휴가철 바다로 가서 위안을 받지만, 현재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대도시에서 아옹다옹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있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바다 생물의 생태, 낚는 방법, 그리고 요리법까지 전해주는 해산물 이야기 책이다. 그동안 알고도 먹고, 모르고도 먹었다면 이제 제대로 알고 먹게 될 것이다. 또 바다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목도하고 그들의 향기와 온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책 속 한 토막
겨울이 깊어지면 집집마다 곡식이 바닥을 드러냈다. 보리가 패려면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 톳을 뜯어다가 밥을 해먹었다. 구황식품으로 으뜸이었다. 톳밥은 톳 줄기로 만든다. 톳이 자라나면 제법 크다. 그것을 데쳐 말리면 잎이 떨어지고 줄기만 남는다. 줄기를 잘게 잘라 쌀이나 보리를 넣고 만든다. 약간의 쌀이나 보리로도 몇 사람 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섬 음식은 탕이 발달했다. 곡식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귀보시탕’이라는 게 있다. 귀보시는 목이버섯이다. 그것을 말렸다가 물에 불린다음 전분가루를 풀어 만든다. 홍합, 문어, 베말, 미역, 거북손, 하여간 그때그때 나는 것이 모두 탕의 재료가 된다. 전분이 들어가 걸쭉하게 변하면서 부피가 늘기에 식사대용으로 쓰였다. 지금도 차례상에 꼭 올라가는 별미로, 버릇으로 해 먹는다.
톳밥은 이제 해 먹지 않지만 톳나물은 지금도 집집마다 상에 오른다. 톳나물은 자라기 전 여린 것으로 만든다. 된장이 주요 양념이며 젓국장 조금, 고추장과 식초, 설탕은 기호에 따라 넣는다. 톳나물에 밥 비벼 먹으면 시원한 바다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자라 버린 톳은 삶고 말린 다음 자루에 넣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숙성시킨다. 다시 삶아 물에 여러 날 담가두면 퉁퉁 불어나는데 그것을 가지고 무쳐먹는다. 톳은 산성화 된 몸을 알칼리성으로 바꿔주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살아남기 위해 먹었던 것을 요즘은 건강식으로 먹으니 세월 참 많이 갔다. 전반적으로 부유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유해졌다는 것을 못 느끼는 모양이다. 이유 없이 불안하고 공연히 안달내고 가만히 있으면 손해 본다고 생각한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는 게 증거이다. 스스로 웃을 능력이 사라져 버려 개그와 예능 프로에 눈 박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 - 한창훈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 세상에 나왔다.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것과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에 낚시를 시작했고 아홉 살 때는 해녀였던 외할머니에게서 잠수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사십 전에는 기구할 거라는 사주팔자가 대략 들어맞는 삶을 살았다. 음악실 디제이, 트럭운전사, 커피숍 주방장, 이런저런 배의 선원, 건설현장 막노동꾼, 포장마차 사장 따위의 이력을 얻은 다음에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로는 한국작가회의 관련 일을 하고 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시로 거문도를 드나들었다.
현대상선 컨테이너선을 타고 두바이와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갔으며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에 승선해 베링해와 북극해를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그 항해를 떠올리며 먼 곳으로 눈길을 주곤 한다. 그리고 문득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고 쓰고, 이웃과 뒤섞이고, 낚시와 채집을 하며 지내고 있다.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소설로 써왔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청춘가를 불러요』, 『나는 여기가 좋다』, 『그 남자의 연애사』, 장편소설 『홍합』, 『열여섯의 섬』,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꽃의 나라』 등이 있고, 산문집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등을 냈으며 어린이 책으로는 『검은 섬의 전설』, 『제주선비 구사일생 표류기』 등이 있다. 한겨레문학상, 요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받았다.
지금은 보리도 그렇고, 톳도 그렇듯이 당시에는 굶주린 배를 채워줄 소중한 식사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식이 아닌 건강식으로 먹는다. 격새지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저자가 말하는 자산어보에는 우리 삶의 풍파가 소금냄새에 비린내가 저려져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2010년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한창훈의 21세기 자산어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초판이 나왔을 당시 이 책은 금방이라도 책장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온갖 해산물에 대한 생생하고 놀라운 이야기들과 함께, 당장 동네 횟집이나 수산물시장으로라도 뛰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침 고이는 문장들로 독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가 두 번째 자산어보이자 신작『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를 출간하며, 자산어보 1탄『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를 새롭게 다듬어 내놓는다. ‘술상’을 준비하면서 미처 ‘밥상’에 올리지 못해 아쉬웠던 바다사진들을 추가하고, 이야기를 다듬었다. 독자들의 눈과 입에 한창훈의 바다가 출렁거릴 시간이다.
이 책의 갈피갈피마다 바다가 철썩거린다. 바다를 껴안고 호젓하게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아기자기한 일상이 가슴속에 수런거린다. 바다를 잊지 못하는 당신, 어느 한 시절 당신의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주었던 바다의 기억으로 순간이동하길 꿈꾸는 당신에게, 이 책에 담긴 푸짐한 바다 한 상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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