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혜로 가득한 책방/에세이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by 더불어숲 2022. 12. 6.

작가의 말
박새를 민간에서는 흔히 머슴새라고 부른다. 저녁 어스름이나 해가 뜰 무렵에 이랴낄낄! 이랴낄낄! 소를 몰아 밭 가는 소리로 크게 울어대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옛날에 한 머슴이 혹독한 주인 밑에서 일을 했다. 주인은 머슴에게 밤낮으로 쉴 틈 없이 일을 시켰다. 낮에 밭을 간 머슴에게 밤에도 밭을 갈게 했다. 머슴은 지쳐 쓰러져 죽었다. 죽어서 머슴새가 된 머슴은 지금까지도 어스름 저녁과 어스름 새벽에 소를 몰아 밭을 간다.


그런데 살아서 그 고생을 하던 머슴은 왜 죽은 뒤에까지도 그 고생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이제 그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육신이 해방되었으니 혼이라도 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은 자못 엄숙하다. 인간의 운명을 그 핵심에서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19세기 중엽에 우리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파리 센강 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서점의 고서 더미에서 보들레르는 신기한 그림 한 장을 발견한다. 인체의 골격을 보여주기 위한 이 해부도는 앙상한 해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림에 제 생각 하나를 덧붙여, 해골이 그 골격을 곧추세워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벌써 저 세상의 몸이 된 이 해골에게도 아직 이 세상의 고생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두 개의 시로 되어 있는 이 시의 뒷부분을 약간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서글픈 체념의 촌놈들아,
너희들의 등뼈나 껍질 벗겨진
그 근육의 온갖 노역으로,
파서 일구는 그 땅으로부터,

말하라, 납골당에서 뽑혀온 죄수들아,
어떤 괴이한 추수를
끌어낼 것이며, 어떤 농가의
광을 채워야 하는가?

너희들 (너무도 혹독한 운명의
무섭고도 명백한 상징!), 너희들이
보여주려는 바는, 무덤구덩이에서마저
약속된 잠이 보장된 것은 아니며,

허무가 우리에게 등돌리는 배반자이며,
모든 것이, 죽음마저, 우리를 속인다는 것이며,
슬프다! 영원무궁 변함없이,
우리는 필시

알지 못하는 어떤 나라에서
거친 땅의 껍질을 벗겨야 하며
우리의 피 흐르는 맨발로
무거운 보습을 밀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해골들은 벌써 죽음의 세계, 허무의 세계에 들었지만, 죽음과 함께 영원한 휴식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어떤 나라에서 “거친 땅의 껍질을 벗겨야 하며”, 피 흐르는 맨발로 보습을 밀며 노역해야 한다.


그들은 죽음 뒤에까지도 영원히 험한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부당한 처사에 대해 우리는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고생하는 자는 영원히 고생하게 되어 있다고 믿는 “서글픈 체념의 촌놈들”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 문학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밤이 선생이다』『우물에서 하늘 보기』 이후에 썼던 글을 묶은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고뇌의 어떤 증언이기도 하다.


난다의 김민정 시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8년 초여름
황현산


책 속 한 토막

한 때 중고등학생들이 일상어에서 욕설에 해당하는 말이 ‘졸졸’ 흐르는 사태를 크게 염려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지금이라고 해서 이 사태가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나로서는 그런 사태를 놀라워하거나 염려하는 편이 아니며, 실상은 그것을 사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무슨 시대적 현상이기보다는 그 나이대의 생리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반세기 전에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나나 내 친구들이 순화된 말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분노나 증오의 표현에 욕설이 앞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뜻밖의 행운에 놀랄 때도, 친구에게 우정을 전할 때도 질펀한 사투리에 상소리로 강조점을 찍곤 했다. 욕설이 언어에 생기를 주었던 듯도 하지만 그것이 폭력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나가는 길에 공연히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의자를 발로 차던 어린 시절의 방자함이, 가장 만만한 것 가운데 하나인 '말'을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언어를 왜곡하고 학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말에 필요 없는 음절을 집어넣는 방법은 고전적이기까지 하다. 우리 때는 음절마다 ‘앵애’를 넣은 어법이 유행했다. 이 어법에서 ‘사랑’은 ‘사앵애라앵앵’이 되고 손톱은 ‘소앵앤토애앱’이 된다. 나는 이 ‘앵애어’를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 특별한 연습을 한 적도 있다.


청년기에 접어드는 학생들이 말에 가하는 폭력은, 말과 자아를 함께 발견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고, 자기를 둘러싼 세상의 의미 체계를 은근히 깨부숴보려는 소심한 모험이기도 하다.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거친 말이 거친 심성을 만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오히려 이미 거칠어진 심성이 그렇게 순화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청소년들의 과도한 ‘말의 축약’이 자주 마음에 걸린다. 


축약의 남발도 말에 가하는 폭력의 일종이지만, 욕설이나 ‘앵애어’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욕설 등은 말을 여전히 말로 대하는 반면에, 과도한 축약어는 말을 오직 ‘기호’로만 대한다. 기호를 소통의 도구로 삼는 사람은 오직 외부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을 말로 대접하여 말하는 사람은 저 자신과도 소통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목차

서문을 대신해서 머슴새와 ‘밭가는 해골’-5

1부
차린 것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 16
전쟁을 안 할 수 있는 능력 - 20
문제는 또다시 민주주의다 - 24
한국일보에는 친구들이 많다 - 28
그의 패배와 우리의 패배 - 32
국경일의 노래 - 36
외래어의 현명한 표기 - 40
방언과 표준어의 변증법 - 44
홍어와 근대주의 - 48
예술가의 취업 - 52
날카로운 근하신년 - 56
말의 힘 - 60
대학이 할 일과 청소 노동자 - 64
공개 질문 - 68
악마의 존재 방식 - 72
진정성의 정치 - 76

2부
종이 사전과 디지털 사전 - 82
어느 히피의 자연과 유병언의 자연 - 86
어떤 복잡성 이론 - 90
한글날에 쓴 사소한 부탁 - 94
인문학의 어제와 오늘 - 98
1700개의 섬 - 102
변화 없다면 ‘푸른 양’이 무슨 소용인가 -106
인성 교육 - 110
운명과 인간의 위험 - 114
다른 길 - 117
마더 구스의 노래 - 120
오리찜 먹는 법 - 125
표절에 관하여 - 129
‘어린 왕자’에 관해, 새삼스럽게 - 135
학술 용어의 운명 - 140
언어, 그 숨은 진실을 위한 여행 - 145

3부
‘아 대한민국’과 ‘헬조선’ -152
식민지의 마리안느 - 157
『어린 왕자』의 번역에 대한 오해 - 162
슬픔의 뿌리 - 167
두 개의 시간 - 170
간접화의 세계 - 174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 180
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 - 186
닭 울음소리와 초인의 노래 - 192
소녀상과 만국의 소녀들 - 198
투표의 무의식 - 204
풍속에 관해 글쓰기 - 210
희생자의 서사 - 216
더디고 더딘 광복 - 220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 226

4부
폐쇄 서사-영화 [곡성]을 말하기 위해 - 232
작은, 더 작은 현실-권여선의『봄밤』을 읽으며-243
미래의 기억 - 253
키스의 현상학 - 263
시간과 기호를 넘어서서 1-영화 [컨택트]에 붙이는 짧은 글 - 273
시간과 기호를 넘어서서 2-영화 [컨택트]에 붙이는 짧은 글 - 282
미라보 다리와 한국 - 292

5부
거꾸로 선 화엄 세계-김혜순 시집『피어라 돼지』-304
세기말의 해방-이수명 평론집『공습의 시대』-307
편집자 소설과 염소-김선재 연작소설집『어디에도 어디서도』-310
이 경쾌한 불안-김개미 시집『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313
시의 만국 공통 문법-천양희 시집『새벽에 생각하다』-316
새롭게 그 자리에-신영배 시집『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319
한국 로망의 기원-조선희 장편소설『세 여자』-322
슬픔의 관리-신철규 시집『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325
미당의 ‘그러나’-『미당 서정주 전집』-328
시인과 소설가-이경자 평전『시인 신경림』-331
문학의, 문학에 의한, 문학을 위한 2인칭-김가경 소설집『몰리모를 부는 화요일』-334
계획에 없던 꽃피우기-정진규 시집『모르는 귀』-337
바람 소리로 써야 할 묘비명-장석남 시집『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340

댓글